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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각으로 새겨진 Link의 선
  
 

미술학 박사   서 영 옥

 


찬 바람이 불던 날 경산에 위치한 신강호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200평 남짓한 작업실에 한기가 감돌았다. 그는 냉한 작업실에서 유리상자에 설치할 파이프투각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신강호 작가는 97년부터 7년간 사회문제를 조명했다. 환경문제, 교육문제, 장애인문제 등 공론화될 사회문제에 관객 참여형 미술을 전개시켰다. 예컨대 기계화된 현대문명을 비판한<나는 지금 떨고 있다>, 생명의 존귀와 보존을 염원한 <생명>시리즈, 환경문제를 다룬 <회색빛>, 학교 교육문제에 접근한 <오늘도 학교는 안녕하다.>, IMF 경제위기를 조형적으로 해석한 <Homeless>, 점자를 테라코타한 <가져가세요.>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공적 관심사에 가깝다. 다소 비판적이고 담론적이던 표현이 조형 탐색적으로 이행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3년부터다. 작가는 그 이유를 삶의 질곡과 지난함으로 꼽았다. 동시대를 직시하며 밀도감을 더하던 지난 작업의 연장선에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작업이 미온적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근작들은 유기적인 선의 조형탐색에 의미를 둔다. 방법적으로는 석고덩어리나 PVC 파이프, 또는 흙을 투각하고, 나무로 선을 만들거나 캐스팅한다. 스크린, 흙, 플라스틱, 석고, PVC 파이프, 나무 등 작업재료도 다양하다. 여기에서 간과될 수 없는 것은 매체의 운용이다. 6m의 파이프 전면에 작은 구멍을 뚫거나, 석고 덩어리에 유연한 곡선을 남기는 일련의 작업과정에는 적지 않은 노동력과 시간이 요구된다. 밑그림 없이 즉흥적으로 투각되기에 집중력도 요구된다. 작가는 고집스럽게도 오랜 기간 이 방법을 고수한다. 유리상자에 설치된 작품도 PVC 파이프 투각 작업이다.
 

투각한 PVC 파이프에 패턴이 그려졌다. 흰색과 회색이 그라데이션 된 파이프 4개가 유리상자에 설치되었다. 나무 형상의 파이프에는 구멍이 뚫렸다. 작은 구멍으로 이어진 패턴은 불규칙적인 선을 이룬다. 그 선들은 유기적이다. 시작과 마지막을 알 수 없는 선들의 연결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 같다. 미로 같기도 하다.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이어짐이 태극문양 같기도 하다. 엄밀히 따지면 애초부터 하나였던 선들이다. 거기에서 음양과 오행, 인연과 윤회가 읽혀진다. 작가는 작업 초두에 이러한 것들을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즉흥성과 직관에만 의존했다면, 원상(原象)의 표출로 봄은 어떨까. 인류의 DNA속에 흐르던 원상이 작가의 관을 통해 손끝으로 드러난 것, 그리 보면 무리일까. 그가 새긴 패턴과 선을 자세히 보면 우리 주변의 것들과도 닮아있다. 혈맥, 잎맥, 잠자리 날개, 벌집, 거미줄 등, 이는 모두 자연의 단면이다. 자연과 가까운 고장에서 성장한 그의 유년과도 무관하지 않다.
 
유리상자에 세운 나무는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상하좌우 불규칙적으로 번진 선들이 앞과 뒤, 안과 밖으로 유동한다. 뚫린 선과 선사이로 중첩의 면이 보이고 그 너머로 다른 세상이 보인다. 선과 선이 새로운 공간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선들은 선이면서 동시에 면이고 공간인 셈이다. 그 형상이 관자의 시선을 다차원으로 안내한다. 조명의 위치와 각도, 벽과 바닥의 기울기나 거리에 따라서 달라지는 그림자도 한 몫 한다. 이렇듯 투각작품은 주변 환경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발한다. 신강호 작가의 투각작업도 작품과 공간의 조화까지를 포함한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공간의 어울림과 빛을 떼어놓고 감상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할 때, 유리상자는 만족스럽지 못한 공간이 된다. 사방이 투명한 유리상자로 들어오는 자연광이 나무의 그림자를 얼마만큼 선명하게 드러낼지 의문이다. 그 대안으로 작가는 전시장 바닥에 움직이는 무당벌레를 출연시켰다. 회색 모래를 흡입한 무당벌레 청소기가 모래를 다시 배출하면서 동선을 그린다. 무당벌레 행선대로 무작위적인 선이 그려지고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결국 그의 선들은 유리상자의 바닥과 공중에서 유동하는 선이 된다.
 
이때 투각의 통로와 선의 유동은 작가와 외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둘은 단절적이지 않다. 유기적이며 상생의 구조이다. 투각 전 PVC 파이프는 원통의 긴 막힘으로 존재했다. 작가는 막힌 표면을 일일이 뚫어 관통의 막을 새로 만들었다. 뚫린 구멍 사이로는 시선을 흐르게 했다. 시선의 흐름 따라 이편과 저편이 드나든다. 드나듦은 관계의 맥이고 그것은 이어진다. 거기에 소통이 있다. 선은 관객을 소통과 상생으로 안내한 것이다. 결국 그가 유리상자에 설치한 선은 소통이 스민 link의 선이다. 이것은 칸딘스키의 설명적인 선도, 생동하는 수묵(水墨)의 선도 아닌 오직 신광호 작가의 직관의 선으로 봄이 옳다. 그의 삶이 스민 선, 기억과 경험과 판단이 어우러진 선, 뜨개실처럼 염원이 엮인 선다. 이어질 듯 끊어지고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진 세월의 선이다. 엉뚱한 흔적을 남기곤 하는 그의 선들은 우리의 삶과 닮았다. 있는 듯 없다가 없는 듯 나타나는 선의 유동은 존재가 사라질 때 함께 멈출 것이다. 그의 선은 삶의 질료이고 생의 토로이다.
 
결국 신강호 작가의 선이 유리상자로 나온 것은 자아와 외계와의 상호성을 자문하고, 관계를 돌아보며 소통을 염원함이지 않을까. 앞과 뒤, 안과 밖, 처음과 끝이 없는 유기적인 그의 선에서 향후 이어질 또 다른 link의 고리를 기대하며.

201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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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글 REVIEW

날짜

2013. 4. 25.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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